씨스타 - 나혼자 (Alone, 2012)

2013. 7. 5. 23:55영상_연예

 

 

씨스타 - 나혼자 (Alone, 2012)

 

 

걸그룹 씨스타의 <나혼자>(Alone, 2012) (작사: 용감한형제 / 작곡: 용감한형제, 똘아이박)는, 씨스타와 같은 19금형 아이돌, 이른바 '성인돌' 유형이 태생적으로 짊어지고 갈 수 밖에 없는 극단적 '호불호'의 대중의 반응을 국내 연예계 내에 하나 더 발생시켜 놓고 인기를 얻은 존재로만 각인되고 치부된 경향이 짙다. 이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성인 유형의 걸그룹이 남성의 성적 욕망을 시각적으로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여성의 관능적 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한, 대중(주로 남성)의 극단적 긍정(YES!)의 반응과 극단적 부정(NO!)의 반응 현상을 말한다( 물론, 이는 성에 대한 위선적 이중성을 드러내는 타락한 인간 대중의 현 실태로서 일반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 그러나 대중을 상대로 어떤 예술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는, 즉 '예술가'(artist)로서의 연예 제작자는 이렇게 단지 동물적인 관점에서의 여성의 성만을 상업화하여 거대 이윤을 획득하려는, 그러한 천민 자본주의적인 목적만을 추구하여 <나혼자>를 제작한 것은 아니다. 비록 대중문화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미(또는 반)계몽적인 다수의 대중을 상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연예업자'인 동시에 '예술가'의 신분의 입장에서는 누구나 '무대'라는 캔버스에 표상하는 자신의 작업물에 좀 더 진지한 인문학적 담론을 은밀히 시도하게 된다. 

 

먼저 의상부터 짚어보자. <나혼자>에서의 씨스타 복장의 전반적인 유형을 볼 때, 실연당한 이 여성은 어떤 '직업여성'으로서 소개되는 것이 분명하다( '직업여성'의 사전적 의미: 1.직업을 갖고 있는 여성(커리어 우먼) 2.주로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 <나혼자>의 여성 캐릭터는 흥미롭게도, 이 두 가지 의미를 전부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그렇다면, 본 음악에서 실연당한 여성은 왜 하필 직업여성인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남성 중심의 시선으로서의 타이트한 유니폼 페티시즘( cf. '성인돌' 걸그룹 브라운아이드걸스 - <Abracadabra>(2009)에서의 검정 가죽의상과 비교해 보라 )과 노출된 미각에 대한 페티시즘( cf. 소녀시대 - <소원을 말해봐>(2009) 에서의 미각은 <나 혼자>의 미각의 의도와는 다소 달리, 여신상 이미지의 숭배를 위한 '고체성'에 더욱 중점을 둔다. 여신 숭배는 페티시즘의 뿌리다 ) 에 호소하는, 통상적인 표피적 감각의 의도만 있는 것일까? 자본 기업은 획일화된 유니폼을 입은 획일화된 체형의 여성을 요구하며 이 획일화를 끊임없이 추구한다. <나혼자>는 이 단계를 넘어서, 현대 산업사회의 노동자 직업군 중 가장 적절한 한 캐릭터를 차용해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 시대의 대표적 직업여성 캐릭터로서 씨스타는 <나혼자>라는 음악을 들고 대중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캐릭터로서의 씨스타는 과연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왜 또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영화를 보고
나 혼자 노래(음악)하고 이렇게 나 울고 불고
나 혼자 길(데이트 또는 산책)을 걷고 나 혼자 TV를 보고
나 혼자 취해(술) 보고 이렇게 매일 울고 불고
넌 떠나고 없어 후회해도 소용없어 오늘도 나 혼자

 

얼핏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나혼자>의 가사 내용은 여성이 처한 실연의 고통과 그 이후의 너무도 피폐하게 변화된 일상 생활을 절절히 묘사하는, 그저 흔하고 비슷한 내용을 가진 또 하나의 대중음악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이 막연하고 평범한 느낌은 본 작품이 전반적으로 표현하는 비관적이고 음울한 정서가 이미 현대 사회에 무의식적으로 녹아들어 완연히 체화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나혼자>가 탁월하게 표현하여 폭로하고자 하는 사회학과 철학 담론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사실 <나혼자> 역시 그 작품 스스로가 대중문화 연예산업의 막강한 동력 요소의 하나로서 대중이 대중문화를 막연하게 긍정하도록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음에도, 역설적으로는 대중문화 산업이 낳은 부조리를 자조섞인 어투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나혼자>의 여성은 지금 현재 정말로 '나 혼자'가 된다. 그런데 <나혼자>가 실연에 대한 투정과 더불어 절박하게 알리려는 진정한 실태의 보고란, 현대 대중문화가 '나 혼자만의 문화'를 끊임없이 조장하고 확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나 혼자>의 가사는 일반적인 대중음악 가사의 그것보다 지나치게 느껴질 정도로 '나 혼자서 어떤 문화적 행위를 하게 된 사실'을 반복 강조하며 묘사하는 데 집착하는 것일까? 사실 이 가사의 반복적 묶음은 매우 흥미로운 역설적 표현으로서, 오히려 밥 먹기, 영화 감상, 노래 부르기, 길 걷기, TV 보기, 술 마시기 등의 이러한 모든 문화적 행위가 현 시대에서는 대부분 '혼자서' 행해지는 경우가 더 잦아졌고, 그래서 인간은 이 소외를 탈피하기 위하여 타인 다수와 대화하고 만남으로서 이러한 문화 행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공동체 내에서도 여전히 익명의 존재로서 '나혼자'가 되어버리는 상황을 확연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모든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소외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실존주의자 마르틴 부버의 표현처럼, 인간의 실존은 '나-너'의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나-그것(밥, 술, 영화, 음악, TV, 피상적인 의미에서의 연애 등과 같은 '물질' 자체)'의 관계만로 전락하여 진정한 '너'를 상실한 것이다. 대중이란 거대한 인간 집단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대량생산된 대중매체에 의하여 생겨난 획일화된 소외된 인간군이며, 대중문화는 인격적인 관계의 삶의 공동체를 분리시키고,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게 한다. 지나치게 대형화된 공동체에서 개인의 요구나 필요는 무시되고 군중심리에 지배를 당하여 인간은 거대한 흐름 속에서 표류한다. 대중은 능동적이지 못하고 현대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하여 수동적으로 대중 안에 속하려고 몸부림친다. 인간은 문화적 주체가 되지 못하고 대중문화라는 거대구조 내에 갇힌다. 인격이 생산과 소비의 거대한 기계에 종속되며, 인간은 자극과 반응의 법칙에 종속되는 기계가 된다. 이렇게 산업 자본주의는 인간이 실재와의 만남에서 본질의 차원을 상실하게 했다. 18세기 초부터 하나님은 불필요해졌다. 교만하게도 인간은 자신이 이 세계와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 인간은 기계 속의 하나의 톱니에 불과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인간은 현실과 본질 사이의 간극을 메우지 못하며,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결국 소외로 타락하게 되었다. <나혼자>의 반복되는 가사처럼 밥, 술, 영화, 음악, TV, 연애 등은 오직 인간 자신의 피상적 욕망의 대상으로서 추구되지만 진정으로 채워지지 않으며, 공허와 무의미, 비인간화를 낳고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을 모든 존재의 중심으로 삼고 성, 권력, 물질 등 모든 것을 끊임없이 소유하려는 악한 욕망이 오히려 인간 실존의 본질로부터의 소외라는 결과를 낳았다.  

 

산업 사회 내의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서구 산업사회와 그 철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된 사상과 삶의 합리적 체계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도 실존주의자였다. 19세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의하여 형성된 대중의 문화를 비관하였다. 그는 인간이 노예화되며 소외되는 존재가 되는 모든 상황을 전복하는 혁명을 제시했다. 그는 물론 인간이 선한 공동체와 노동의 성취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깊이 이해했다. 그는 단지 가난의 문제 뿐 아니라 인간이 거대한 기계의 부속으로 취급될 때의 자존심의 상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인간과 인간의 의식은 단지 기계의 한 부품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유물론자였기에 오직 이러한 관점의 사회적인 인간만을 본다. 그래서 마르크스에게서 실존에 대한 접근은 사회적으로 결정된 인간, 사회 계급의 일원으로서의 인간 실존의 경험이다. 마르크스는 거기에서 인간의 소외를 발견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마르크스의 투쟁은 현실적인 '공동체'를 이룩하는 데 실패했으며 여전히 외부적이고 소외된 '연대성'의 표피만을 우리에게 남겼다. 반 세기 전 실존주의자 틸리히가 말했듯이, 여전히 현대 인간은 산업 사회의 지배정신에 더욱 강력하게 항거해야 한다. 항거의 정신은 인간의 실존적 고통에 대한 실존주의적 정신이다. 실존주의는 산업 사회의 구조 내에서 일어난 산업 사회의 정신에 반대하는 항거다. 물론 이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적 혁명 또는 제도에 의한 항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틸리히는 인간 존재가 '궁극적 관심'이자 '실존의 깊이'인 '영원한 진리'를 만남으로써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영원한 진리란 성경이 증언하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실재'다.

 

역시 씨스타의 <나 혼자>는 포스트모더니즘, 허무주의적 상대주의가 만연하는 현 시간대의 세계에서 여전히 실존주의가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나혼자>로써 탁월하게 증명한다. 모더니즘, 산업 자본주의가 낳은 인간의 실존적 소외의 문제는 단지 외부 세계의 모든 가치를 무의미화하거나 상대화해 버린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전히 나에게 끊임없이 '고통'이 찾아오고 나와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고통받고 있다는 현 실태를,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각자 영혼 내의 무의식에의 울림에 의해 태생적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실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혼자>는 지독한 역설에 의한, '저급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경이로운 결과물이다. 용형은 통상적으로 매우 저급한 에로틱한 표상을 띄우고 여기에 '실연 내러티브'를 제시하면서도, 그 표상 자체가 스스로 본질의 심층에 접근하는 '실존주의 내러티브'를 제시하여, 이 두 내러티브가 균형을 유지하면서 평행하게 흘러가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이 '평행 연출'은 용형에 의해 매우 정교하게 의도된 연출의 결과다( 그러므로 <나혼자>는, 대중 상대의 대중문화 작품군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드문 사례다. 일반적으로 대중문화는 현실이 본질에 접근하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그대로 고착화하거나 더욱 왜곡하는 방법으로 단지 상업적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대중문화가 제시하는 표상은 그 대중문화가 명료한 의미나 가치를 지닌 비평적 담론의 가능성을 제공하지 않으므로, 실제 대중문화의 실재와 괴리된 무분별하고 과장된 비평 행위들이 세계의 본질과 진리에 대한 접근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반적인 대중문화의 한계를 상당히 극복하면서 세계적으로 신선함을 보여준 최근의 영화 중 하나로 크리스토퍼 놀란 연출의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2008)가 있는데, 이 작품 역시 두 내러티브가 평행하게 연출된 드물고 탁월한 사례다. 하지만 본 영화는 부분적으로 무성의한 연출을 남기면서 단점을 노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하여는 추후 구체적으로 비평한다 ). 또한 실존주의적인 <나혼자>는 플라톤주의적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어떤 철학적 충동을 에로스라 불렀다. 에로스란 감성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나아가려는 충동으로서, 이 충동이 이데아(본질)를 인식하는 단계로 올라서게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육체적 형상에서 느끼는 쾌락은 가장 낮은 단계의 에로스다. 플라톤에 의하면 아름다움의 직관은 준비 단계일 뿐이며, 이러한 충동에 변증법적 사유가 더해질 때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대중)은 <나혼자>를 연기하는 씨스타의 뇌쇄적인 눈빛과 디테일한 몸짓, 관능적인 육체 형상에서 가장 낮은 단계의 충동인 에로스를 직관적으로 경험하는데, 여기에 적절한 변증법적 사유인 실존주의 철학이 병행 연출되면서 인간이 본질에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나혼자>의 이 치밀하고도 적절한 표상에도, 역시 자신의 실존적 소외에 거의 무감각해져 버린 현 대중에게는 이것이 자연스럽게 자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 혼자>는 현대 대중예술이 표피적 감각에만 듬뿍 도취되어 있는 대중을 어떻게 품어 가면서도 또한 어떻게 대중을 이끌어서 진리에 대한 근원적 물음으로 접근하도록 유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책임론 및 지향의 패러다임을 탁월한 역설의 행위로써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나혼자>가 받은 거대한 대중적 인기의 무의식적 측면에서의 강력한 요인이었을 수도 있다.

 

2013.07.05 예촌

 

참조영화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1927)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1936)
워킹 걸 (Working Girl, 1988)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 1995)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A Single Spark, 1995)
노는 계집 창 (1997)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2008)
클라우드 아틀라스 (Cloud Atlas, 2012)

 

참조문헌

 

손봉호, [ 기독교적 관점에서 ] (나비출판사, 1989), 161-171.
이정석, [ 문화신학 ] (서울: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2012), 51-53.
김경재, [ 해석학과 종교신학 ]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7), 32.
최병학, [ 영화관에서 만난 현대 신학자 ] (부산: 도서출판이경, 2006) 102-103.
Paul Tillich, [ 문화의 신학 ] 남정우 역, (서울: 기독교서회, 2002) 53-56, 96, 101, 112, 191, 195.
James W. Sire, [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 (서울: IVP, 1985) 110, 114, 132, 160, 178, 196.
Hans Joachim Storig, [ 세계 철학사 ] (서울: 자음과모음, 2008) 23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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