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Mother, 2009 _비평 (엄청난 스포일러 경고)

2013. 1. 30. 03:30영화

<경고: 본 영화 비평은 아주 치명적인 스포일러로 완전히 도배가 되어 작성된 글이므로,
만약 이 영화를 사전 지식 없이 관람하려 한다면, 이 글을 조금도 읽지 말 것을 권한다>



성욕해소 불만 아들의 엄마에 대한 심리 복수극


영화 관람시, 일단은 너무 고민하고 긴장하지는 말라. 원칙적으로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영화<마더>는 예상보다 훨씬 쉬운 영화다. 영화의 기본 뼈대가 대중적으로 아주 쉽게 읽히지만, 물론 결코 가볍지는 않다. 이상하게도 봉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카메라에 들어갔던 힘을 한번 느슨하게 빼어 보기로 작정한 듯 하다. 전작에서의, 어떻게 보면 다소 작위적인 면면들이 흐려지면서 상대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은 부드러워졌다. 여러모로 영화가 디테일의 힘이 뭔가 다소 빠진 듯 하여 약간씩 아쉽지만, 극단적인 풀샷과, 얼굴을 함뿍 담은 클로즈업샷의 리드미컬한 교차 편집은 전반적으로 차분하면서도 격정적으로 흘러가면서,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다양한 미장센, 이번 영화에서 새롭게 내세운, 바닥에 흘러 번져가는 '물'에 대한 디테일. 역시 아름답고 탁월하며 신선하다. 여고생 시체를 마치 정물 오브제로 취급하여 카메라를 붙박이로 놓고 길게 테이크를 가져가주는 연출도 위트가 넘친다. 특히 교도소 면회씬에서 김혜자의 앞얼굴facade과 옆얼굴profile을 번갈아 클로즈업하면서 크게 크게 때려넣어 주는 장력 역시 여전히 좋다. 원빈의 연기도 훌륭하고, 무엇보다도 김혜자의 연기력에 대하여 굳이 어떤 평가나 다른 이견이 있을 수나 있겠는가. 굳이 흠을 잡는다면, 도준의 친구, 진태 역의 진구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데 - 그는 도준과 엄마 두 인물 사이에 끼워 들어감으로서, 모자 관계라는 단조로운 이원적 구조를 부분적으로 흐트러뜨리고 우발적인 긴장을 부여할 수 있는,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될 수 있는 제 3의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구는 연기 자체는 좋았으나, 영화에서 양아치형 건달의 이미지가 전형적이고 견고하게 묘사가 되어 있어, 입체적인 김혜자와 원빈에 비하여 너무 평면적이며, 이 영화의 일종의 '삼각'관계에서 다소 부자연스러운 충돌을 자주 일으킨다. 그 중 특별히 하나를 꼽아 본다면, 엄마가 진태의 남성적 폭력성을 활용, 그를 교사하여 고교 남학생들을 고문.취조하는 씬은 그 이미지와 분위기상 영화 전체 맥락에서 볼 때 너무 진하고 어두워, 자칫 잔잔하면서 부드럽게 흘러가고 있던 영화의 흐름을 잃을 뻔했다. 어쨋든간에 분명히, 본 영화는 어느 면으로 보나 꽤 잘 만들어진well-made 영화로서, 극적인 재미가 쏠쏠하며, 김혜자의 연기가 실로 눈부시는, 단적으로 표현할 때, 하나의 '좋은 영화'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 정도의 상투적인 평가로서 끝날 수 없는 영화다...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이 영화는 결코 가볍지 않다. 과연 겨우 이 정도의 단선적인 이야기만을 하기 위해, 아무려면, 봉준호가 무려 5년 전부터 기획을 해 왔을까? 사실 영화를 관람하기도 전에 누구나, 김혜자가 연기한 마더mother, 즉 엄마가 이 영화의 분명한 주인공이며, 이 엄마가 무능력한 아들을 위하여 무언가 중대한 일을 벌일 것이라는 예상은, 영화 제목 <마더>만 보더라도, 또는 공개된 영화 포스터만 한 번 쳐다 보더라도 금방 알아 챌 수가 있다. 그러나 연출자는 이런 단순하고 쉬운 예상, 그리고 그에 따르는 선입견에 의해, 엄마의 아들에 대한 병적 집착, 소유욕, 그 왜곡된 모성이 빚어낸 비극적 스토리라는 단선적이고 성급한 하나의 결론에서 벗어나, <살인의 추억, 2003><괴물, 2006>의 연장선 상에 서서 아주 교묘하고 탁월하게, 상식적이고 통상적인 모자관계, 그리고 개인과 사회간 관계를 비틀어 엮어서, 인물들이 발생시켜 놓은 어떤 상황,상황들의 의미들을 다각적으로, 다시점으로 확산시켜 놓았다.

도준이 5살이었던 유년 시절, 당시 생활고에 시달렸던 엄마는 아들과 동반 자살을 하려다 실패하고, 아들 도준은 그 때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이후 정신 지체아가 되어 버린다. 영화 초반부에 도준이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복수','복수'는, 우연히 골프장에서 배워 온 단순한 '단어 유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농약으로 살해하려 했던 엄마에 대한 증오심이 수십년간 꾸준히 자라오다가, 성인이 된 지금 시간대에 와서야 비로소 떠올랐으며, 이제 본격적으로 엄마에 대한 모종의 '복수극'을 교묘하게 진행하려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번 상기시켜 보라. 바로 그 뭔가 괴이했던 모자간 교도소 면회 씬중 하나다. 아들은 뜬금없이 엄마가 농약을 먹였던 사실을 놀랍게도, 매우 담담한 어조로 꺼내면서 엄마와 격하게 - 정말 놀랍게도 - 논리적이까지 한 논쟁을 벌이다, 진심인듯 아닌 듯 엄마와의 면회까지 거부한다. 이 순간은, 잘 흘러만 가고 있던 엄마와 아들의 관계, 그 상투적인 모자 관계를 뒤짚어 버린, 예측하지 못했던, 대단히 놀라운 장면이다. 이 급작스러운 소통 불일치의 노출은, 아들 도준과 엄마의 관계, 그리고 아들 도준과 사회와의 관계 불일치의 노출에서, 심지어 영화와 대중 관객과의 관계의 불일치로 확장된다. 당황해 하지 말고, 계속 따라 읽어와 보라. 우리는 도준의 정신 지체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음이 분명한데도, 영화 관객을 비롯한 마을 주변 사람들의 고정된 선입견은, 정신 지체인의 언행을 정상인의 일반적인 잣대에 맞추어서, 주어진 상황에 맞게,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며 규정하고 결론짓는 극악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맞다. 이것은 우리 한국 사회의 여전히 심각한 고질병인, 사회적 소수자, 장애인에 대한 차별 의식과 선입견이다. 직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도준이라는 '남성男性'의 성적인sexual 고민과 문제에 대하여 그토록 무관심하고 냉담한 시선만을 유지하는가? 그의 외모와 행동거지를 살펴 봤을 때, 뭔가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속된 말로 '어리버리'하기 때문에, 육체적인 욕구, 즉 성욕은 별로 생기지 않는다고 보는 것인가? 그러니까 그냥, 적당히 무시해 버려도 되는 것인가? 영화 속에서도 그렇다. 형사, 고교생, 술집 마담을 비롯한 대부분의 마을 주변 사람들은 수시로, 뚜렷한 근거없이 자의적으로, 제 멋대로, 도준을 거의 성 불구자로 취급하고 규정해 버린다. 연출자의 카메라는 바로 이렇게, 대중 관객의,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고정 관념, 편견을 상영시간 내내 은근하면서도 아주 통렬하게 비판을 하고 있음에도, 비장애인이 대부분인 대중은 이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잘 알아 차리지 못하는 것이, 대중적으로 볼 때는 상식적이고 당연한 모습이지 않겠는가? 

아들 도준은 이미 신체적으로 훌쩍 장성한 상태이기 때문에, 주위의 도움과 절차를 밟아서, 또래의 비슷한 장애인 여성이라도 만나서 서로 사랑을 하거나, 결혼을 해야 할 나이임에도, 아직까지도 엄마의 침대를 떠나지 못하여 매일 엄마와 둘이서 잠을 자고 있는, 기형적인 형국인 것이다. 엄마는 아들에게 일관되고 갑갑한 과잉 보호만을 일삼아 왔으며, 28년간 같이 살아왔으면서도, 엄마는, 장애인 아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 교육, 관리 등이 상당히 미숙했고, 평소 아들과의 진실된 대화들를 거의 나누지 못하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정윤철 연출, 조승우 주연의 영화 <말아톤, 2005>에서의, 아들의 정상적인 성장을 유도하는 김미숙의 모성母性과는 분명히 그 성향이 다르다. 이것은 이 영화 속 비극적인 살인 사건과 함께,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비극적인, 어떤 '한 가족'의 비인권적인 현실이며 비이성적인 현상이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라. 우리는 닭백숙을 같이 먹고 있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가 비교적 돈독하고 정감있게 보인다...라는 지극히 독단적인 판단을 내려 버린다. 하지만 무슨 근거로 그 판단을 확정할 수 있겠나? 당신은 이 남자가 만족스런 식사나 대화를 하고 있는지, 그 도준의 진심을 본인이 알고 있다고 정말로 확신하는가? 여기에서 아들 도준은, 사실은 별로 관심은 없는 듯이, '여자와 자겠다'라는 말을 엄마 앞에서 마치 장난을 치듯이 내뱉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사는, 지금 현재 이 장애인 아들의 성적인 욕구 불만이 극에 달하여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연출자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지속적으로, 은밀하게 띄우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연출자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성적인 코드를 주목해야만 한다. 콘트리트 법면에 노상 방뇨를 하고 있는 아들 도준의 씬을 떠올려 보도록 하자. 물론 상식적으로나 통념적으로나, 엄마가 아들의 고추를 잠깐 쳐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장면 역시, 엄마의 아들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다 자란 아들, 즉 성인 남성의 성기를 단지, 그 입에다가 '보약'이라는 '물'을 먹이면, 성기로 '소변'이라는 '물'이 배출되는, 단순한 배설 기능의 용도로서만 인정하려는 제스춰이며, 이성간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쾌락과 생식 기능의 용도로서 존중하지 않는다는, 엄마 나름대로의 선언적 시선인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추적해 들어가다 보면, 아들 도준은 원조교제로 마을 내에서 상당히 유명했던 고교생 문아정을 우연히, 아무 생각없이 쫓아간 것이 아니다. 충격적이게도, 그는 그 장소에서, 자기 나름대로는 진짜로 원조교제를 시도하려 접근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원조교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분노에 의해 여학생을 의도적으로 살해했다. 뭐, 의도적으로? 아니, 의도적으로 살해를 했단 말인가? 도무지 이런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뻔뻔스럽게 배포하는 예촌 당신은 도대체 누군가? 믿기 힘들겠지만 그렇다. 이 지체 장애인 남성도, 정상인 남성과 똑같은 성욕에 의해, 똑같은 감정으로 치정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지금 현재 표면적으로 우리 눈알에 제공되고 있는 아들 도준의 언행을, 그저 그 자체, 텍스트적으로만 따라가서, '바보'라는 비하 발언에 의한 우발적인 범행으로 판단해 버리고 거기서 그냥 논의를 끝내 버린다면, 그 층위 이상으로 접근할 수가 없게 된다. 또한 모자의 취침하는 모습은 어떠했나? 침대에 엄마와 아들이 누워 자는 씬은 초반과 후반 딱 두번 뚝 떨어져서 등장하는데, 초반에는 도준이 팬티만 입은 알몸으로 누워 자고, 후반, 즉 출소한 이후에는 옷을 전부 입고 누워 잔다. 무엇이겠는가? 살인 사건 당시 표면적으로는 도준은 여고생을 죽이기만 한 것이었으나, 사실은 옷을 벗고 실제 물리적인 성행위를 목적으로 밖에 나갔다 온 것이다. 도준의 성욕 불만, 자신의 성욕을 해결해 주지 않는 엄마의 과잉 보호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마치 침실 내부 처럼, 그대로 계속 머물러 존재하여 왔음을 은유한다.

구舊세대인 엄마가 신新세대 문화에 대하여 익숙치 않은 것, 즉 세대간 문화의 이질적 충돌을 드러내는 대목 또한 흥미롭다. 최신식 핸드폰 개조 문화나 생리대 매매 문화도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은 엄마가 건달 진태의 집에 숨어 들어갔다가, 진태와 재수생 여친과의 성행위를 우연하게 관음하게 되는 장면이다. 진태가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캐릭터를 상징한다면, 도준은 그것과 정 반대의 극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매우 미묘하고 은밀하다. 어떻게 하다보니, 그저 우연하게도 이 엄마가, 이런 성적인 문화sexual culture를 접한 것인가? 이 영화의 성행위는, 성행위가 전혀 관심이 가지 않을 엄마 세대, 즉 구세대와 비교해 봤었을 때 (물론 여기서는 박진표 연출의 영화<죽어도 좋아, 2002>에서의, 노인들의 숨겨져 왔던 성욕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해하리라 본다) 젊은 성인 세대, 즉 신세대가 그 나이대에 반드시 즐겨야 할, 쾌락의 행위, 의무적 절차, 통과 의례로써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혼전 성교,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님) 사실상 이 성 행위는, 여기 이 여대생을 어설프게 찝적대기만 했던 아들 도준에게 하루 빨리 적용되어야만 했는데, 엄마는 이 장면을 낯설고 신기하게 관음까지 했으면서도, 자기 아들에게 필요했던 바로 이 성적 조치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도 아들의 결핍된 상태, 그 성적 욕구에 대한 엄마의 무지와 무관심을 폭로하는 장면이다. 그 조치는, 마치 쥬세페 토르나토레 연출, 모니카 벨루치 주연의 영화 <말레나 Malena, 2000>처럼, 발정난 사춘기 아들의 성욕을 풀어주기 위해 사창가에 아들을 투입하는 아버지의 심정, 즉 부성父性과 같은 것이다. (사창가로 보내는게 바람직하다라는 얘기가 아님)
   
또한, 이 영화는 도준의 '엄마'에 대한 복수로 읽을 수도 있지만, '사회'에 대한 복수로 읽어 낼 수도 있다. 다시 생각해 보라. 이 마을 구성원들 대부분은 도덕과 정의에서 사뭇 벗어나 은밀하게 타락하여 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피해자 원조교제 여고생의 핸드폰 사진에는, 마을의 성인 남성 거의 대부분의 인물 사진이 찍혀 들어 있다. 심지어 형사 제문의 모습까지. '마을'이라는 '사회' 전체가, 여성을 착취하는 거대한 남성성의 권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도준은 이 마을 사회가 가하여 온, 정신적, 신체적 무시와 차별, 억압으로 정상적인 사회성을 획득하지 못하며 비정상적으로 자라왔다. 더욱이, 바로 곁에서 '진태'라는, 마초성의 지극히 상징적인 인물에 의해 오랜기간 은근히 이용 당하며 패배적으로 살아왔기에, 이제 도준은 오늘에 이르러 드디어 용기를 내어 이 여고생과의 성적 접촉을 통해, '당당한 남성성'을 소유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한 것인데, 그 시도가 실패하자, '여고생'이라는 비윤리적 문화의 뿌리를 아예 거세해 버림으로써 이 마을의 사악한 동력원으로 기능했던 남성성의 권력구조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남성 각개가 서로서로 비겁하게 공유하며 지배해 왔던 마을 사회는, 애초에 '진실'이라는 것을 굳이 규명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마을 사회 전체가 근본적으로는 여고생 살해사건의 공범인 까닭으로, 진실을 계속 추적하다 보면 자연스레 각개 남성 자신들에게 그 책임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여 온 공공의 범죄자 집단인 남성 권력층은 도준 대신 종팔이라는 대체 인물을 세우는 데 그다지 주저함이나 의심이 없으며, 굳이 유일한 목격자였던 고물상 아저씨의 사망 원인 또한 규명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바로 도준의 입장에서 계획했던 '사회'에 대한 복수는, 자신의 분명한 살인 행위를 이 '사회'라는 존재에 그대로 자백하지 않는 것으로, 도덕적 판단과 정의로운 결정만을 내린다는, 또는 내려야만 한다는 '사회'에, 이렇듯 분명한 '비진실'의 흠결 또는 착오를 남김으로써 이룩된다. 마치 정상인인 자신들은, 도덕적이고 정의롭다고 착각하는 그 '사회'의 위선을 까발려 폭로시켜 버리는, 정신지체 장애인인 자신보다 더욱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인, 현대 사회 구조에 대한 통쾌한 조롱과 비판이다.

그렇다면 왜 마지막에 도준은 엄마에게 침술기구 박스를 굳이 건네어 준 것인가? 역시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서? 도준은 그 행위로서, 처음부터 이 살인 사건이 분명한 정상인의 범죄였음을, 그래서 오히려 그 범죄를 솔직하게 자백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회에 대한 반항과 보복을 실행하였다는 진실과, 그동안 교도소에서 맛있는 콩밥을 먹으며 나름대로 편하게 기거하면서, 어디까지나 엄마에게만 정보를 조금씩 흘리는 수법으로, 엄마를 사설 탐정으로써 도리어 거꾸로 교묘하게 이용해 왔음을 폭로한 것이다. 의문을 품고 돌이켜 보라...도준은 엄마가 변호사를 데려오자, 다분히 의도적으로 동문서답을 함으로써 변호사를 내쫓아 버리는 데 성공한다. 사실은 이것마저도 도준의 치밀한 계획대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엄마의 '그 변호사, 엄마가 짤랐어.'라는 대사는 참으로 미묘하고 의미심장하며 아이러니하다. 도준에게 있어서 살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고물상 아저씨를 제거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으므로, 자다가 어느 순간 그 때의 그 얼굴이 떠오르자, 득달같이 '면회''면회'를 요청하며, 엄마가 그 목격자의 신원을 추적하게끔 유도한다. 도준은 엄마가 목격자를 만나 엄마가 진실을 알게 되면, 엄마가 살해를 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을 가능성이 크다. 23년간 항상 같이 해 왔던 엄마이기에, 이런 추론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정말 어이없게도, 이것은 자신을 제대로 키워 주지 않은 엄마에 대한, 장난 같지만 결코 장난이 아닌, 무시무시한 심리 복수전이다. 결국 도준이 출소하여 진태의 차량을 타고 집으로 복귀하다가 목격자의 작업장, 즉 엄마에 의해 불이 나 잔해만 남은 그 살인 현장을 찾아가는 것 역시 우연히 발견하여 찾아간 것이 아니다. 도준은 계획적으로 그 장소를 찾아 가서, 혹여나 부주의한 엄마가 결정적인 증거를 남겨 놓지 않았을까 하여, 그 증거를 회수, 현장을 훼손하려고 간 것이다. 도준은 이 작업으로 살인자 엄마를 완전 범죄화하고, 살인자 자신 역시 더욱 확실하게 완전 범죄화하는 데 성공을 하는 것이다. 종국에 와서, 고속버스 터미널 대기실에서 아들에게 침술킷트를 건네받고서야, 엄마는 도준의 실체와 본심을 비로소 명백히 알아차리게 된다. 살인 현장에서 물적 증거까지 찾아다가 보여주는, 지독히 계획적이고 의도된 행동을 보여주어야만, 엄마는 도준이라는 '한 성인成人 남성男性'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보 아들'에 대한 고정 관념과 편견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것은 분명히, 23년 동안의 복수를 완성하는 순간이다. 엄마를 연기했던, 배우 김혜자의 라스트씬에서의 과도한 당혹스러움을 상기시켜 보라. 그것은 단순히 범죄에 대한 죄책감의 차원이 아니다. 사회와 소통에 실패해 왔던 장애인 아들 도준은 이렇게 완전 범죄를 이루고, 엄마를 고속 버스에 태워 자신으로부터 멀리 보내 버리는 것으로, 비로소 '성인 남성'으로서 온전한 '자립'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마마보이 장애인을 키워왔던 한 모성애 지극한 엄마의, 목숨을 건 사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놀랍게도 - 어린 시절 사고로 장애를 얻은 한 남자의 자아 발견의 사투, 자신을 둘러싼, 가족과 사회와 대중 관객의 편견을 부수어 버리고, 23년간 기다려 온 '복수'에 성공, 자신의 잃어버린 '남성다움'을 되찾으려 노력했던 하나의 '인생극장'이 아닌가?

이 영화에서 엄마는 춤을 춘다. 인트로 씬의 억새밭 춤과 라스트 씬의 고속버스 춤, 이렇게 영화는 춤으로 시작하여 춤으로 끝난다. 아주 가볍게 흐느적대다가, 결말에 이르러서, 발갛게 지는 석양과 함께 정신없이 흩뿌려져 버리는 춤의 향연. 초반부 억새밭 가운데 엄마의 춤사위같이 잔잔하면서도 건조한 감성은, 의도적으로 미묘하게 혼합.배치되어 미묘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배경음악과 어우러지면서 영화 전체를 관통해 흘러간다. 모성母性은, 살인이란 폭력적인 행동마저도 가벼운 춤사위처럼 자연스러운 본능에 의해 흘려 보낼수 있는 '유동流動'의 몸짓이다. 이제 라스트에서, 모든 진실까지 밝혀 버린 아들 도준은 일련의 비극적 사건의 비밀을 폭로할 수도, 은폐할 수도 있는 최종 선택권을 엄마에게 부여한다. 이것으로 아들은 분명한 성인 남성으로서 마지막까지 엄마에게 인정을 받아 내려는 제스춰다. 엄마는 버스에서 약 10초간 선택을 고민한다. 결정적 현장 증거물로서 기능할 수 있었을 침술킷트는, 엄마가 그 박스 안의 바늘침을 꺼내어 자신의 허벅다리에 찔러 놓음으로서 다시 본래의 의료 기능만을 회복한다. 모성母性은 죄의식과 책임감이 극에 오른 그 순간까지도,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희생하며, 잊어 버리려고, 덮어 버리려고 한다. 오로지 자신의 혈육인 아들을 위해서라면, 비록 아들이 엄마인 자신까지 철저하게 이용하고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을지라도, 무조건 이해하며 용서한다. ( 영화<공공의 적> 참조 ) 그것은 마치 얼키고 설켜서 그 형체를 제대로 알아 볼 수 없는 고속버스 내의 춤사위 실루엣처럼, 아스라하고 미묘하며 모호하게, 개인적인 고통과 상처, 심지어 현실 사회에 반하는 부도덕과 불법과 패륜마저도 흩뿌려서 날려 없애 버리려는,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방산放散'의 몸짓이다 

포스 마더 혜자

p.s.초반의 골프채 아이템은 날렵한 이미지, 그 세장미, 스윙 액션 특유의 부드러움, 또한 상대적인 부富의 상징이자, 살인 무기의 용도로 쓰이고 있으나, 중반부 쯤에서 사라지면서 영화에서 통전적으로 기능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필자는 후반부에서 엄마가 목격자를 살해 시에, 골프채를 무기로 사용할 것으로 예상했다. 골프채는 중반 이후에라도 어떤 명분을 삼아서 끼워 들어 갔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p.s.알란 파커 연출, 케빈 스페이시,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영화 <데이비드 게일The Life of David Gale, 2003> 사형제도 폐지론자 교수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한 여기자의 사투를 그린 이야기로 영화<마더>의 기본 얼개와 유사하다. 참조하여 보라. 전혀 범죄자 같지 않아 보이는 '바보' 연기자의 무죄 석방 이야기, 브라이언 싱어 연출, 케빈 스페이시 주연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The Usual Suspects, 1995>역시 참조. 비슷한 성향의 '바보'가 등장하여 현대 사회에 던져져 소란을 벌이는, 이창동 연출, 설경구, 문소리 주연의 영화 <오아시스, 2002>역시 참조. 자신을 살해한 아들의 범죄를 알고도 아들의 삶을 위해 오히려 은폐시키려는 모성의 이야기, 강우석 연출, 설경구, 이성재 주연의 영화 <공공의 적, 2002>역시 참조. 거의 비슷한 영화적 사회관을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봉준호의 전작 <살인의 추억, 2003>참조. 봉감독은 <살인의 추억>이후, 이렇게 아직도 할 얘기가 남아 있었다. 박찬욱 연출의 영화 <복수는 나의것, 2002><올드보이, 2003><친절한금자씨, 2005>전부 참조

p.s.이렇게 하여 봉감독은 '엄마의 모성'을 극단적으로 그려보고 싶었다...고 공식적으로는 가볍게 설레발을 치면서도, <괴물>에 이어 또다시, 자신이 그것과 더불어 말하고 싶었던 메세지들은 기가 막히도록 교묘하게 은닉을 해 놓았다. 간혹 감독의 장면 장면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 인터뷰가 각종 미디어에 게재될 때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연출의 변'은 모호하게 설레발 쳐주는 것이 관행이다. 과거 <괴물>평을 쓸 때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이번 영화평은 정말로 봉감독을 한번 보여주고 싶기도 하다. 영화 <마더>는 놀랍게도, 봉준호식의 내러티브와 비주얼에, 박찬욱식의 복수 모티브, 캐릭터 실험이 혼합되어 있음을 추출해 내게 된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영화는 이번 금년, 2009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박쥐>와 함께 칸 영화제에 진출했다. 박찬욱 감독은 <마더>공식 사이트 인터뷰시 이 영화에 대하여, "철저하고 지독하고 완벽한 영화입니다"라 하여 마치 립서비스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아마도 박찬욱은 거의 진심으로 이 발언을 했을 것이다. 그는 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분명히 음흉한 미소를 수없이 띄웠을 것이다. 아무래도 자기가 즐겨 써 오던 예의 그 '승부수'와 상당히 흡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칸 본선 진출에도 실패하고,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수상도 하지 못한 원인에는, 영화가 전반적으로 메세지의 다층적인 전달, 영상의 집중도가 어딘가 부분적으로 다소 미약했거나 좀 모호했다는 평가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막판에 아주 대놓고 <유주얼 서스펙트>적으로다가 제시해 버리는 것이, 외국인의 입맛에 맞았을런지도 모르겠다. 영화 자체의 판을 뒤짚어 엎으려는, 이 작품의 <올드보이>적 반전의 무시무시한 실험성과 그 미묘한 은닉성은 분명히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p.s.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어떤 한 영화를 관람하기 전, 대중에게 공개된 시놉시스와 예고편, 그 영화와 관련한 각종 기사 한 줄 터럭도 읽지 않으려고 눈을 피해 도망다니는 일은 일종의 '즐거운 고통'이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적인, 또는 테크닉적인 완성도를 꼼꼼이 논하는 것은 사실상 그다지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우리는, 김혜자와 원빈이 연기해낸 인간의 본성, 애증, 모성, 모정, 모자관계, 그리고 인간사회 관계론에 대하여 다양한 담론을 꺼내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서로 보이지도 않는 각각의 장소에서,
항상 제 글을 읽어 주시는 여러분들 감사하며 사랑합니다2009.05.30.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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