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네이터 4, 2009 _비평

2013. 1. 23. 23:00영화

인간(관람자)의 상상력을 제거(terminate)하려는 기계(카메라)공습의 시작

영화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라는 것은 인간이 상상해 왔던, 즉 꿈꾸어 왔던 비현실적인 상image을 최대한 현실적으로realistic 가공하여 스크린 상에 투영함으로써, 주로 시각에 의하여, 인간의 다양한 감각적, 감성적 쾌감을 발생시켜 주는 매체다. 1984년 그 날 이후, 전세계 대중이 7년 동안 상상해 왔던 그 날이 다시 실현된 1991년, 그 기다림은 오히려 인간의 상상을 훌쩍 뛰어 넘어서는 보답을 받았다. 1991년 이후 또 다시 12년을 상상해 왔고, 2003년 그 날은 또다시 실현되었으나, 이번에는 큰 실망감을 남겨 주었다. 이제 그 이후, 6년을 상상하며 기다려 왔고, 2009년 오늘, 그 날이 돌아왔다. 20년 이상 '재미있는 액션영화'라는 흥행 오락물의 범주, 그 좁은 틀에서 완연히 벗어나, 전 세계 지구상의 다채로운 문화형들을 '선도하는 문화' 라는 반열에 서서 끊임없이 조명되고 담론되어, 이제는 너무도 폭 넓게 증폭되어 버린 대중의 '지구시 오아시스적 천만가지 상상력'을, '영화'라는, 어떻게 보면 한낱 매체 덩어리에 불과한 좁은 범주의 문화형이, 다시금 회귀시켜, 지속적으로, 확실하게 만족시켜 주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mission일런지도 모른다. '상상imagination'이란, 손에 잡힐듯 잡힐듯 하면서도 항상 손아귀에서 벗어나 저만치 달아나 있는 무형의 존재이며, 그것은 인간 고유의 특성이며, 능력이다. 인간의 '상상'이란 '무형'의 물질은, '유형'의 영상을 제조하는 기계(카메라)가 어느정도 흉내내어 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온전하게 대치될 수는 없다. 물리학적으로, 공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그 '흉내'는 인간 실존의 한계, 그 '운명'을 바꾸어 보려는' 일종의 인간 의지의 차원으로써 존중되는 것일 뿐이다. 그 의지적 노력에 인해 창조된, 미래 지향적이고, 가치 지향적인 인간의 각종 창작물은, 다시금 그 창작물에 의하여 인간의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고 발전시켜, 또다른 창작을 종용하는 순환체계를 형성하여 왔다. 그러하기에, '인간의 상상'이란 '무형의 물질'을 영상에 의해 유형적으로 실현한다는 개념에는,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하게 딱 떨어지는, 명료하고 선명한 상image, 즉 단적으로 표현하건대 <상상想像 = 영상映像>의 등가적 대치만으로 머물러 있지 않은, 그 이상의 무엇이 담겨 있어야 한다. 상상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면서 영화를 소비하려는 인간의 욕구는, 단지 그 상상 자체의 절대적 값어치만을 가지고 영화 매체와 흥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본질적으로 진보적이고 탐욕적이기에, 자신의 상상의 영역이 외부의 영향에 의해 확정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상상이란 물질은 자꾸만 새롭게 떠오르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또다른 상상을 재생산, 첨부하면서 진보해 나간다.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본능의 차원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당연히, 상상에 의해 생성된 영상은, 적어도 또다른 상상의 여지를 제공해 주는 훌륭한 미덕까지 드러내 주지는 못하더라도, 인간의 상상을 연출자 자의적으로 해석, 규정하고, 그 영역을 확정지어, 그 답답스러운 사고 의식의 틀 속에서 '다듬어진 상상'을 붕어빵 찍듯이 복제 재생하여 판매하는, 소위 프랜차이즈 맥도날드 햄버거 영상 상품이 되어서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층위에서부터 문제를 유발시키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인간의 상상에 대하여, 이 정도 수준의 등가적인 관점만을 계속 견지한다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인 '상상력'은 심각하게 훼손damaged되며, 이것이 순간적인 실수가 아니라, 상업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 교묘히 의도적으로 제조, 배포되어 대중에게 서비스되어 가고, 그것이 미래에도 계속 비슷한 양태로 진행되어 갈, 할리우드 영화 제작,연출의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본다면, 대중의 '상상력'은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영화'에 의해 오히려 제거terminated되는, 충격적인 미래 영화 문화사회를 예견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니, 이미 그 음울한 미래 사회는 언제부턴가 진행되어 와서, 사실상 현재에까지 도달해 왔으며, 대중 관객은 이제는 기계(카메라)에 의한 인간(영화관람객)의 지배 상황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그 무저항non-resistance의 상태에서 팝콘이나 입 안에 털어 넣고 콜라 종이컵 빨대나 빨며 즐거워하고 있는, 정신적으로 죽어있는terminated존재이지 않은가?

여기, 이제는 전혀 불가능을 모르는 CG와 자본 물량에 여전히 도취되어 교만에 빠져 있는, 할리우드 제국의 전반적인 매너리즘적 영화 제작 풍토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아니 어떻게 보면 의도적으로 별로 벗어나기 싫어하는 영화가 한 편 또 등장했으니, 그것이 바로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속편 <터미네이터4 salvation: 미래 전쟁의 시작, 2009>이다. 이 영화는 일단 영화에서 필수 불가결한 주인공, 존 코너 역의 크리스찬 베일부터가 그 흡인력이 강렬하지가 못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존 코너는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어린 시절부터 미래에서 과거로 온, 현재의 시간대에서 기술적으로 전혀 가능하지 않은, 최첨단 살인 기계를 경험하고, 그렇게 스카이넷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 왔으면서도, 미래의 본인이 현재의 자신에게 보낸 선한 목적의 기계,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기계 T-800과는 매우 친해져, 마지막에는 그 기계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며 눈물까지 흘리던 인물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미래의 운명에 대하여 의심하면서, 순응하기도 하고, 운명을 개척하려는 의지도 보이며, 엄마 사라 코너를 오히려 위로할 줄도 아는, 조숙하고 인간적인,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이렇듯 미래의 위대한 저항군 지도자가 될 소년 존 코너에게 기대해 온 대중의 상상의 범위는, 단순히 기계군단 스카이넷을 증오하면서 전투 임무만을 충실히 수행하는 튼실하고 냉철한 군인의 모습, 그것만은 결코 아니다. 그는 그저 할리우드형 마초 군인답게 연기를 잘 해 냈을 뿐이다. 아쉽게도, 은근히 기대를 해 보았던 저항군 지도자로서 존 코너의 리더십 역시, 명확하게 확인해 낼 수 없다. 물론 이것을 크리스천 베일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시나리오의 빈약함과 촬영술의 진부함 정도로 짚어두기로 하자.


미래 전쟁이 시작된다...라고 한다면, 존 코너 뿐만 아니라, 당연히 저항군도 있어야 할 것인데, 이 영화에서 존 코너가 이끄는 저항군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전작에서 보여진 저항군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영화에서 보여지고 있는 저항군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관습에 의해 길들여진 기존의 전쟁 영화 속 군인들을 아주 쏙 빼 닮았다. 한 번 가슴 깊이 회상해 보라...그 좁고 음침하고 더러웠던 주거 공간...핵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은 인류의 생존을 건 마지막 사투...콘트리트 폐 건물에 적당히 들어가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노약자, 어린이들...그들의 눈빛에서는 그 어떠한 희망도 읽혀지지 않았고, 단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만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심야에 벌어지는 저항군과 기계와의 전투씬은, 실로 '계란에 바위치기'식의, 인간의 무력함과 생존의 처절함이 지극히 강렬하고 압축적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절박한 상황이어야, 존 코너의 영웅적인 전투 업적은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존 코너와 사라 코너가 절대로 죽으면 안 되는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터미네이터 1,2 에서 얼마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의 씬만으로도, 디스토피아적 미래 사회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극대화시키고, 현재 시간대의 추격 스토리를 거시적으로 이끌어 가는, 시간성을 가진 동력 축으로써 효과적으로 기능했었음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4편에서의 군인들, 또는 연구자들 대부분은 정말로 기계, 즉 스카이넷과의 처절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들 평안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옷차림도 깨끗하고, 식량 조달에도 문제가 없는지 대부분 혈색도 좋다. 그렇다...대단히 슬프게도, 이들은 우리가 꿈꾸어 온, 상상해 온, 저항군의 모습이 전혀 아니다. 영화 속 저항군의 묘사, 즉 스카이넷에 대항할 만한 일정한 병력이 있음을 과시하는 듯한 제스춰, 또한 군 조직체계, 명령체계를 강조하는 듯한 제스춰는 전작 터미네이터 1,2 에서의 병력의 절대적 열세 상황, 스카이넷의 핵전쟁 공격에 의해 대부분 무너져 버린 문명사회, 군 조직, 명령 체계의 혼란 상황을 극복하면서 생존에 몸부림치던 일종의 헝그리 정신, 미래에서 온 군인 카일 리스 캐릭터가 함축했던, '맨주먹 붉은피', 6.25 적 군인정신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치명적인 배신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제작자, 연출자의 무심한 듯한, 아니 오히려 '이게 당연한 거 아냐?' 라고 말하는 듯한 그 뻔뻔한 태도는, 저항군을 총괄 지시하는 사령관, 그리고 그가 위치한, 사령 본부내의 군인들과 배경 이미지에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잠수함 내에 사령 본부를 두고 그 내부에서 원격으로 작전 명령을 내리겠다는 사고부터가, 마치 토니 스코트 연출의 <크림슨 타이드Crimson Tide, 1995>와 같은, 전후좌우에 퍼진 상황병들이 각종 레이다를 쳐다 보다가 상황을 보고하면 상관자는 가운데에 심각하게 서 있다가 명령하는, 지겹도록 할리우드스러운, 소위 <상황 본부head quarter> 설정씬이 아닐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크림슨 타이드>처럼 어떤 명령 체계나 신구 세대 갈등에 대한 담론 따위는 당연히 있지도 않다. 저항군을 지휘한다는 '상황 본부'라는 설정 자체가 정말 진부하기 짝이 없는, 쓸데없는 것을 첨가하는 짓으로, 이 설정은 아예 없더라도 이 영화에 아무 지장이 없으며 오히려 영화를 손상시킨다. 아니, 한 번 생각을 해 보라. 처음부터 오합지졸 거지같은 저항군 조직을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규합하여 이끌어 가는 영웅적 인물이 존 코너여야 합당한 것이지, 기계가 인류를 거의 말살시키는 직전의, 그 절체 절명의 종말적 상황까지 도달하여 있는, 터미네이터의 세계관에서, 무슨 저렇게 첨단 장비가 깨끗하게 완비되고, 합리적이며 권위적인 상부 군 조직이 버젓하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전투기를 비롯한 각종 동력 기계는 어떠한가? 물론, 터미네이터1,2에서 촘촘하게 이룩된 동력 기계들간의 물리적 역학 관계론, 그리고 인간과 동력 기계간의 사회 문화론이 담겨 있으리라고 애초에 기대하지는 않았다. 역시 기존의 터미네이터 해골endo-skeleton이미지만 가지고는 당연히 영화를 2시간 동안 견디며 보기가 지겹다고 판단했을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유형의 전투 기계와 차량들이 등장을 하여 열심히 전투를 벌이고는 있으나, 그저 단순히 신기해 보이는 기계 이미지들을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선보이는 정도, 코엑스coex적 전시회 개념에서 그치는 수준이다. 사실 이 영화의, 밑도 끝도 없이 들이대기만 하는 군국주의적 성향은, <터미네이터>라는, 실로 다양한 가치를 확산시킬 수 있는 그 방향점들을, 극단적으로 한 쪽으로만 치우쳐 버린 실망감이 짙다. 이 영화가 은근히 빌어와 써먹는 영화 중의 하나인, 제임스 카메론 연출의 <에이리언 2 Aliens, 1986>에서의 상징적이고 직관적인 군국주의 이미지와는 그 차원의 층위가 한참 다르다. 후반부에서, 마이클 베이 연출의 <진주만 pearl harbor, 2001>류의 노골적인 격납고 씬, 또한 라스트 씬에서, 데이빗 그린 연출,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아파치 Fire Birds, 1990>류의 석양을 뒷배경으로 날아가는 헬기 무리 (나는 이런 이미지를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한다) 까지 굳이 등장시켜 주는 모습을 보더라도,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관습적인 군국주의 전쟁 장르 영화로서 대우받기를 원하는 제스춰로 읽힌다. 물론 좋다. 전작의 쫓고 쫓기는 추격자 이야기가 아니라, 본격적인 미래의 전쟁 이야기만을 하겠다는 의도는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세우기는 이렇듯 전쟁 장르 영화라면서도, 영화는 아리송하게도 적군 vs 아군이라는 상호 대립적 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의 액션 이미지가 객관적으로는 화려지만서도 어딘가 집중이 산만하고 나사가 풀려 있는 듯한 이유에는, 바로 선,악의 대립, 오가닉과 메카닉의 대립이 분명치가 않다는 점에 있다. 저항군이 너무 기괴하고 복잡한 형태의 기계들과 접하고 싸우면서, 인간 vs 기계의 그 명징한 이분법적인 대결 구도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저항군은 실체가 없는, 그러니까 사실상 적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가상의 무엇과 계속 무의미한 전투 쇼만을 벌이는 듯한 허무감만이 계속 남게 된다. 물론 기계, 즉 CPU는 인간처럼 말을 하거나 협상을 하지는 않겠지만, 전작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던 '스카이넷'이라는 무형의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 그 개념적인 이미지가 영화적으로 확고하고 권위있게 묘사가 되고, 그것이 영화의 기반으로써 먼저 통전적으로 깔려진 후에, '기계 군단'이라는 적군들에 대한 묘사가 조심스럽게, 점진적으로 이루어 졌어야 했다는 것이다. 아니면 역으로, 혹시 영화가 '무실체와 싸우는 전쟁의 덧없음과 무력함'이라는 일종의 철학적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라고 한다면, 논의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흡사 영화 <씬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 1998>처럼.   

영화의 주된 배경, 사막의 건조하고 광활한 배경을 볼 때, 일견 미국의 걸프전, 아프간전, 이라크전 등의 사막전의 은유가 있지 않겠느냐...라는 의문 역시 쓸 데 없었다. 단지 연출자는 문명이 파괴된 미래 사회를 사막적인 분위기로 표현하고자 했을 뿐이며, 그래서 이 영화에서의 사막은, 터미네이터 1편의 라스트 그리고 터미네이터 2편의 중반부에 양념으로 끼워져 들어가서, 영화라는 매체만이 표현할 수 있는, 사막 공간 특유의 미묘한 휴식성, 여운성, 낭만성이 사라져 버렸고, 마치 롤란드 에미리히 연출, 장 끌로드 반담, 돌프 룬드그렌 주연의 SF액션 전투영화 <유니버설 솔저 universal soldier ,1991>속 사막 수준의, 그저 표피적인 감각만을 만족시켜 주는 가벼운 낭만만이 2시간의 대부분을 채운다. 그리고 저항군의 주된 운송 수단으로 강조되고 있는 '수송헬기'는 사실 엄밀하게 봐서는 너무 '리얼 군인'스럽다. 저항군이 물론 군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현세적인modern 느낌이 강한 수송헬기를 타고 돌아 다니게 되면, 우리가 상상해 왔던 터미네이터 세계관에 입각한 특유의 미래 세계는 여지없이 짓눌려 파쇄terminated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송헬기'의 이미지는 미국의 사막전보다는 오히려, 베트남전의 잔상 또는 상흔을 떠올리게 되는데 - 올리버 스톤 연출, 찰리 쉰 주연의<플래툰 Platoon, 1986>과 같은 베트남 전쟁 영화에서 보여지는, 수송 헬기안에서 밀림을 훑어 내려다보는 시점은, 무의미하고 무분별한 침공을 감행하는 미 제국주의의 헛된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 지극히 이국적이고 생소한 타지를 허무하게 바라보도록 유도하는 시점으로 사용되었다. 어디 베트콩이 헬기타고 전투하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할리우드 전쟁 영화에서 '수송헬기'의 이미지는 상대적인 약자에 대한 강자의 '침략' 오브제로서 존재하였다. 역시 리들리 스콧 연출의 영화<블랙 호크 다운 black hawk down, 2002>에서 소말리아 내전에 참가한 미군은, 이렇듯 미 군국주의 또는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권위적 이미지의 '헬기'를 적지 한복판에 떨어뜨려 버리는데, 그 기체의 훼손 상태뿐만 아니라 헬기 자체의 현 위치만으로도 상대적으로 강자의 입장에 서 있는 미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굴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러한 '수송헬기'가 가진 영화역사적 가치는, 터미네이터 4편에 와서 새로운 변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인가? 전편의 원칙대로라면 분명히, 스카이넷 기계군단은 상대적으로 강자요, 저항군은 상대적으로 약자일진대, 약자적 위치에서의 저항군과 권위주의적인 수송헬기는 서로 그다지 잘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지 않은가? 여기서는 저항군의 침투 작전 그 자체를 관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용도로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무분별하게 차용되었을 뿐이지 않은가? 언제부터 초라했던 저항군이, 헬기와 전투기를 자유자재로 동원해 가면서 기계 스카이넷과 거의 동등한 병력으로 이렇게 당당하게 저항하여 올 수 있었는가? 이런 식으로 저항군의 위상을 연출자 제 멋대로 격상시켜 놓아도 되는 것인가? 

물론 이런 헬기 담론은 디테일에 대한 부수적인 아쉬움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이 영화의 근본적인 취약점은, 영화에서 하나의 굵직한 플롯을 형성해가는, 쌤 워싱턴이 연기한 '마커스'라는 캐릭터가, 초반부터 별다른 효력을 발생시키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최근 이런 할리우드의 상투적인 내러티브와 촬영 공식에 너무 충실한 영화들을 보게 되면, '미드', 즉 미국 드라마와 비교할 때, 기술적인 완성도와 자본 물량의 차이를 제하고 바라본다면 특별히 다르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영화라는 영상물이 TV 드라마와 다른 매력을 지녀서, 극장을 굳이 제 발로 찾아가서 관람하게 되는 이유에는, 단지 물량을 쏟아부은 흔적이 역력한, 예의 그 스펙타클한 영상을 순간 쾌락적으로 즐기고자 하는 욕구 이외에도, 영화라는 영상물이 상대적으로 시간 분량이 짧기에, 영화 속 각개 캐릭터의 깊이 있는 심도, 압축되어 표현된 카메라의 시선들이 TV 드라마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할리우드 개봉 영화의 캐스팅 수준, 그리고 캐릭터에 카리스마를 불어넣으려는 연출자의 노력 등은, 마치 가벼운 '미드'를 관람하듯이 무성의하기 짝이 없다. 마커스뿐만 아니라, 여전사 블레어, 어린 시절의 카일 리스 역시 모두 그럭저럭 정도 연기 수준의, 밋밋하게 국어책 읽고 있는 수준의, 그다지 매력이 넘치지 않는 캐릭터에 머물러 있다. 물론 새로운 캐릭터를 첨가하여 시리즈를 계속 이어나가려는 그 노력은 바람직할 수 있다. 터미네이터 3편의 어이없는 캐스팅 사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전에 깊이있는 인물 스터디 없이 외모적으로 그저 적당히 그럴싸한 신인 배우들을 분별없이 영화 안에다 첨가해 버리면, 제작이 사뭇 진행된 상황에서 혹여나 영화 전체를 말아먹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음에도, 이제는 무작정 교체할 수도 없는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마커스란 어떤 인물인가? 마커스는 사이버다인 시신기증 프로젝트의 실험용 모르모트로 사용되었다가 15년이 흐른 후 극적으로 다시 살아나, 자신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정확히 모르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인물이다. 기계에 의해 이용을 당하지만, 종국에는 자신을 살려준 기계를 배신하고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마커스 캐릭터는 폴 버호벤 연출의 <로보캅 robocop, 1987>, 리들리 스콧 연출의 <블레이드 런너 blade runner ,1993>와 같이, 인간 정체성, 또는 실존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제대로 던져주고 있지 못하다. 철학적 깊이감에서 그렇지 않은 것은 일단 둘째로 치더라도, 본 영화적 문맥에서 최소한의 기능으로 존재하지도 못한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마커스가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든지 기계라고 생각하든지, 그 사실이 중요할 이유가 없다. 슬프게도, 이 영화는 마커스라는 캐릭터가 애초에 그 의미나 필연성 자체가 없다. 더불어, 그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여전사 블레어도 비슷한 상황이다. 영화에서 제시하는 마커스 캐릭터 설정과 논리는 다소 유치하고 진부한데, 마커스의 정체나 비밀은, 엄밀하게 따지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다. 마커스가 기계에 의해 의도된 스파이였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그 비밀을 깨달은 마커스가 어떤 태도를 취할는지, 그런 캐릭터 성향이야 그저 스토리의 전개상 적절하게끔 시나리오 작가가 요리조리 조절해가면서 설레발 쳐버리면 되는 '쉬운'상황 아닌가? 또한 존 코너가 마커스와 같은, 심장을 가진 기계를 처음 접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질 이유가 도대체 뭐가 있는가? 이렇게 마커스 캐릭터의 명분을 영화 내에서 확실하게 쌓지 못한다면, 결과론적으로 마커스가 없었어도, 충분히 다른 방식으로 존 코너가 카일 리스를 구하거나 만나며, 스카이넷에 침투하는 데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봉 전에 설정해 두었었는데 유출되어 버렸다는 엔딩, 즉 존 코너가 죽기 직전 마커스의 기계 몸을 빌려 터미네이터로 다시 태어난다는 충격적인 결말 정도는 있어 줘야, 마커스와 존 코너의 만남과 그 논쟁적인 대화가 어느 정도 의미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코너가 기계가 된다는 결말은, 끄트머리에 가서 억지로 존 코너를 터미네이터화하는 것 뿐이지, 4편 영화 전체 맥락에서 존 코너가 기계와의 결합을 이룩할 만한 명분, 즉 개연성이 전혀 없다. 생각해 보라. 4편에서 존 코너는 시종일관 아날로그적인 전투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느라 바쁘신 몸이었고, 잠깐 어쩌다 마커스를 만나서 기계와 인간에 대한 질문 몇 개 던져본 게 전부였는데, 왜 마지막에 가니까 무조건 기계의 도움을 얻어 충격적인 환생을 하는가? 이것은 흡사 복부에 맹장수술을 받아야 할 환자의 가슴에다가, 막판에 뜬금없는 전기 충격요법을 시행하는 듯한, 동문서답의 격이다. 복선이 부실하니까, 맥락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결과다. 본 영화는 기계와 인간에 대한 담론적 깊이가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인간 존 코너를 함부로 기계로 변신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수정된 결말이 적절하다는 말도 아니다. 새로운 인물 마커스로 승부가 안 될 것 같았으면, 존 코너 1인 체제로 밀어 붙인다던가 하는,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정공법을 취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터미네이터 4편은 감각적이며 묵직한 액션씬과 박력넘치는 사운드 효과, 눈부신 속도감이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비교적 괜찮은 액션 영화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저 시각 말초적으로 화려하고 짜릿한 몇몇 스펙타클에 도취되어, SF 사이버펑크 장르영화와 현대전쟁 장르영화를 절묘하게 혼합시켜 놓은, 새로운 스타일의 액션 영화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그저 쉽사리 발설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전작을 변질을 시켜 놓을 것이면, 뭐하러 <터미네이터>라는 브랜드를 달고, 구질구질한 스토리와 캐릭터 혼란만 유발하는 영화를 자꾸 만들어 내는가? 아예 처음부터 새로운 타이틀을 기획해서, 다른 개념의 사이보그와 인간의 대결을 재 창조해보려는 시도가, 오히려 지금의 이 결과물보다 나은 SF 미래 전쟁영화를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터미네이터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을 시각 영상화해 주었다는, 그 기술적 수행의 노력에 대한, 지극히 순수한 '감사'의 마음이 생겨난다기 보다는, 오히려 폭넓고 다양하게 상상해 왔던 그 상image들을 이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선을 그어 닫아 버리는, 영화의 극 보수 쇄국주의적 태도에, 그 상상력의 피지배에 대한, 정신적 환불을 요구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영화를 통해, 인간(영화관람객)은 기계(카메라)에 의해 오히려 상상력을 제거terminated당하고 있는 위기의 형국임을 분명히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암담하고 우울하다. 여전히 불확실한 영화 관람의 미래가 인류 앞에 놓여 있지만, 그래도 그 부정적인 운명을 바꾸려는 의지 역시 인간에게 있기에, 아직은 그 소소한 희망까지 버리지는 않으려 한다 NO FATE  

p.s.자질구레한 것들은 너무 복잡하여 첨부 형식으로 나열하고 끝을 맺는다. 예상은 어느 정도 했었지만, 영화의 부제, salvation 구원은 아무 의미없는 폼잡는 단어였다. 아니, 단지 시그널 교란에 의해 스카이넷을 섬멸한다? 이런 간단한 공략법은 롤란드 에머리히 연출의 <인디펜던스 데이 independence day, 1996>에서 목격한 것 같은데...기계군단이 T-800제조를 위해 생체실험용 인간들을 납치하여 감옥에 가두어 관리하는 모습들은 흡사 스티븐 스필버그 연출의 <쉰들러 리스트 Schindler's List, 1993>를 연상시켜 잠시 흥미로웠으나, 나중에 영화가 끝날 때가 다가오니까, 아니나 다를까...잡혀왔던 포로들은 할리우드적으로다가 막판에 전부 안전하게 풀려난다. 이 역시 어이 없었고...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실망스러웠던 것은, 역시 존 코너와 카일 리스의 만남, 그 뭉클해야만 할 첫 대면이 그다지 짜릿한 전율로 다가오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부분을 거론하자면 한도 끝도 없고, 감상중 잠시 관심이 갔던 부분을 언급한다면, 사라 코너가 아들 존 코너에게 들려주는 육성 테이프와 사라 코너의 유품, 즉 폴라로이드 인물 사진이 나오는 장면, 터미네이터가 기어서 존 코너를 쫓아오거나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쫓아오는 등의, 터미네이터1,2 전작의 몇몇 추억의 명장면들이 오마주로 나타나지만, 역시 그저 피상적인 수준이다. 또한 후반에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CG의 능력을 빌려 깜짝 출연하기는 한다. 2편이 아니라 1편때의 젊은 터미네이터 모습으로 나온는데, 너무 과도하게 부풀려진 풍선같은 몸에, 스토리와 상관 없이 어거지로 끼워 넣어 등장시키고 있어서, 아놀드가 6년만에 다시 등장했으니 눈물이 나와야 할 것도 같은데, 나지는 않았고, 자신의 과거 친구였던 아놀드 T-800의 모습을 오랜만에 본 존 코너가 요만큼의 반가운 기색도 없이 계속 총질만 해대서 더더욱 맘에 들지 않았다. 작곡가 브래드 피델의 그 유명한 충격음, 탕탕,탕탕탕! 이것이 초반 인트로와 아놀드 등장씬, 두 세번 정도만 나오는데, 그 이상 자주 나오지 않아 다소 짜증이 났으나, 영화가 전반적으로 실망스러워 그다지 아쉽지도 않았다. 카일리스 역의 아역배우 안톤 엘친은 나름대로 터미네이터 1편의 마이클 빈 연구를 상당히 많이 한 듯 하다. 발음과 억양, 표정이 꽤 비슷하다. 마이클 아이언사이드(미드 '브이 V ,1983',영화 <토탈리콜 total recall, 1989>,<스타쉽 트루퍼스 starship troopers, 1997>출연)의 저항군 사령관 역할은 전혀 알지 못했었기에 정말 반가웠다. 아마도 후속 5,6편에서는 성인이 된 카일 리스를 과거로 보내는 장면, 그리고 저항군이 스카이넷 본부 제조공장 등지에서 T-800을 탈취한 후, 이 기계를 아군 편으로 프로그래밍하여 역시 과거로 보내는 장면이 나올 듯 한데, 이 정도 수준의 영화 시리즈 흐름이라면 역시 별로 기대되지 않는다. 물론 허무함과 어이상실의 극치을 달렸던 터미네이터 3편보다는 4편이 여러모로 낫다. 필자가 보기엔, 터미네이터 골수 매니아들이 반드시 봐야만 할 필요가 있는 영화는 아니다. 다만 이 영화가 시리즈의 속편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영화 자체만으로는 그럭저럭 괜찮게 본전은 쳐 주는 할리우드 액션 오락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p.s.필자는 어린 시절 한 청소년 잡지 한켠에 조그맣게 실린 영화<터미네이터>의 시간여행에 관한 기사를 읽고, 그야말로 막연한 호기심을 키워 오던 중, 1991년 <터미네이터 2 : judgement day>가 극장에서 개봉을 앞둔 몇 주 전, TV에서 방영한 <터미네이터 1, 1984>을 시청하면서 좀체로 빠져 나오기 힘든 미래사회의 공포와 손에 땀을 쥐는 스릴을 경험, <T2>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더욱 증폭되었고, 사전에 <T2>에 관한 어떠한 시놉시스와 동영상 예고편도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였는데...그래 바로 이것이었다...어린 시절의 내가 막연히 꿈꿔왔던 시간여행, 사이보그, 미래사회, 묵시록에 대한 판타지가 너무도 적절하고 완벽하게 영상화되어 있음에, 매분 매초마다 엄청난 긴장과 충격과 전율로, 완전히 그 영화 세계가 현실인 양 정신없이 빠져들어 관람을 했으며, 극장을 빠져 나오자 종로 밤하늘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환상적인 경험을 했다. 지금에 와서도 그 때의 그 초현실적 영화 관람 경험의 쾌락을 다시 비슷하게 느낄 만한 영화를 만나지 못하였고, 이렇게 영화 <T2>는 필자 본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개인 삶과 항상 함께 해 왔다. 이후 출시된 <T2> 비디오테이프와 DVD를 통틀어 <T2>는 지금까지 100번을 넘었는지, 재 관람 횟수 계산이 제대로 되지를 않는다. 당연히 그 후 <터미네이터 3: rise of the machines>를 은근히 기다려왔고, 2003년, 여성 터미네이터가 등장하는 <T3>를 역시 극장에서 관람, 그 후 밀려오는 아쉬움과 허무함과 괴로움에 며칠 동안 정신적 식음을 전폐하였으며, 2008년 TV시리즈<터미네이터:사라 코너 연대기>를 시청하면서, 과거의 터미네이터는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전설'로 자리매김하여 가고 있음을 이제는 확연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 <터미네이터 4>라는 영화를 관람하며, 아쉬움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개인적으로 성숙된 순간에, 이제 이렇게 <T2, 1991>이후 18년이 지난 현 시간에 와서, 인터넷이라는 첨단의 문화를 향유하며, <터미네이터 4, 2009>의 영화 비평을, 터미네이터 영화 이야기를 여러분과 같이 공유하게 된 것이, 무비 키드 시절의 과거 시간으로 돌아갔을 때, 정말 꿈만 같고, 참으로 행복하다. 필자의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감사하며, 모두들 미래에 복 받으실 것입니다